* 불교의 이해 *
불교의 근본 사상...(6) 가전연경(迦전延經)의 정견(正見)
[불교의 근본사상] 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
10. 가전연경(迦전延經)의 정견(正見)
가전연경이란 근본불교에서 가장 핵심되는 경입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한 내용, 즉 중도(中道)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가전연경에 대해서 논의가 많았습니다. 그런 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고 또 중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면 이 가전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가전연이란 부처님 신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논의제일(論議第一)이었던 가전연존자를 말합니다. 아주 의논을 잘하고 논의에 밝은 분이었습니다.
어느날 가전연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대덕(大德0이시여 정견(正見)을 갖추어야 한다, 정견을 갖추어야 한다 하시니 정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모든 세간의 학문이나 종교는 무엇이 있다(有)든가 무엇이 없다(無)든가 하는,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의두 가지 견해에 떨어져 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상대적인 대상에서 가장 기본되는 견해가 유·무라는 견해이니 이 상대적인 유·무가 완전히 해결되면 그밖의 모든 상대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와 무를 대표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거 고(苦)와 낙(樂)을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그때는 오비구(五比丘)가 고행(苦行)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고와 낙을 말씀하셨던 것이고 이 가전연경에서 정견(正見)이라는 근본문제를 가지고 깊게 설명함에 있어서 일체 세계의 대표적인 상대인 유와 무를 들은 것입니다.
변견(邊見)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이라는 뜻입니다.
「가전연아, 정혜(正慧)로써 여실(如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觀) [正觀生]하는 자(者)에게는 이 세간에 무인 것이 없다.[非無] 가전연아, 정혜로써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유인 것이 없다.[非有]」
남전대장경 제13권 상응부경 가전연경(南傳大藏經 第十三卷 相應部경 迦전延經)
집(集)이란 4성제(四聖제)의 집제(集제)이니, 집제란 연기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에도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관으로 연기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이 일어난다,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생겨나 살아가고 있고, 있음으로 하여 결국 존재해 있음을 말하니 이러한 현상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세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여 보았자 통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책상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세상 모든 것이 없다는 견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생(生)하는 법을 바로 본다(正觀生)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존재해 있고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있는 것을 바로 보면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없음이 아닌(非無) 것입니다.
멸(滅)이란 사성제(四聖제)의 멸제(滅제)이니 멸제란 역관(逆觀)으로 연멸법(緣滅法)을 이르는 말이니 설명하자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것으로써 책상도 나무가 썩어 버리면 없어지고 너도, 나도 촛불도 시간과 공간이 다하면 없어지기 마련이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또 다른 한편에서 관찰해 보면 소멸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없어지는(滅) 법을 바로 본다.(正觀滅)는 것이며 이런 견해로 세상을 보면 모든 존재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내가 없는 것을 바라보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있다는 것이 아닌(非有)것이 됩니다. 따라서 없는 것이 아닌 있다는 견해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없어지는 것을 보고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고 다시 모든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견(有見)측에서는 무견(無見)이 틀리고 무견 측에서는 유견이 틀리는 것입니다.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방편(方便)에 취착(取着)하며 계교(計較)하며 사로잡히(囚)나니 성제자(聖弟子)는 이 마음의 의처(依處)에 취착하며 계편(計便)되어서 「나의 나」라고 사로잡히지 않으며 착(着)하지 않으며 머물지(住) 않고[囚有消滅], 고(苦)가 생(生)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定觀亦生亦觀] 혹(惑)하지 않으며 의심(疑心)하지 않으며 타(他)에 연(緣)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生)하나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그것은 사량분별 때문입니다. 아(我) 주관과 아소(我所), 객관등의 모양에 사로잡혀 사량분별하는 이것을 여기서는 방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이 생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제자, 즉 부처님의 제자는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을 버리고 모든 분별심, 생멸심을 떠나버리며 결국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하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냥 고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는 것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세간에서 보는 것은 분별심으로 보는 것이고 부처님의 제자는 분별심을 떠나서 보기 때문에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집착하고 계사하는 마음을 버리고 사로 잡히거나 머물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무주심(無住心), 무분별심(無分別心)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변견은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있고 부처님 제자의 정견은 무분별심이 근본이 되고 있는 것이니 불생불멸의 경지에서 생멸을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는 모든 분별에 사로 잡히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고(苦)의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쌍조(雙照)이니 이것이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定觀亦生亦滅)는 것입니다.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변견이 아니며 생멸견해가 아닙니다.
생멸적인 변견은 바로 삼차원의 세계에서 보는 관점이고 생멸을 떠나서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을 묘유(妙有), 즉 사차원의 세계에서 보는 견해로서 절대적인 견해입니다.
앞의 말씀을 잘 구별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집착을 떠난다고 하고서 결국은 또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고 했으니, 이 생멸은 보통 생멸의 생멸이 아닌가 하고 오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생멸의 생멸이 아니고 불생불멸의 생멸, 즉 집착하지도 머물지도 아니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생멸이라는 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멸,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생멸입니다. 생멸의 생멸이 아니라 쌍차에 의지한 쌍조의 생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마음의 의지처, 즉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도 아니한다고 부정하였으므로 그것은 모든 생멸을 부정한 것입니다.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니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분별심이 없이 이에 지혜가 생한다는 긍정이 나옵니다. 긍정은 심광명(心光明)을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면 심청정(心靑淨)이며 진공이며 쌍차입니다. 심청정하여 생멸을 바로보면 심광명이고 모유이며 쌍조입니다. 그러므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보아서(定觀亦生亦滅) 진공묘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혹(惑)하지 아니하며 의심(疑心)하지 아니하며 타에 의지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하니 이것이 정관(正觀)이다」하는 것은 부처에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조사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는 머물음이 없는 마음, 무주심(無住心)에서 진실의 지혜가 나타나는데 이 지혜를 정견(正見)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무주심이란 진여심, 반야심을 말하니 의지함이 없는 완전한 진공이 즉 진여심이니, 의지함이 없는 진여반야에서 지혜가 생하니 이것이 정견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견의 내용은 모두 집착심, 생멸심을 다 버리고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이니 쌍차하여 쌍조한 것이며 진공묘유이며, 청정심을 얻으며 심광명이 바로 현전함을 말합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이 아직 완전한 연결을 못시키고 있습니다.
중도라 하여 양변을 여읜다, 쌍차한다 하는 부정의 면은 보통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데 다시 양변을 살린다, 쌍조한다는 부정한 후에 다시 그것을 긍정하는 이것을 지금도 학자들이 잘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좀 많이 연구했다는 학자들의 책을 봐도 양변을 여읜다는, 쌍차라는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드러나 있으나 그걸 가지고 증거를 대는데 있어 부정한 후 그것을 다시 긍정하는 면에 대해서는 즉 양변을 살리다, 쌍조한다는데 대해서는 부처님의 밀의(密意)로서 은밀히 말했다고만 말하고 확실한 증거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만치 이것이 어려운 대목입니다.
밀의로써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쌍차, 부정(否定)하신 후에 다시 분명하게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타(他)에 의(依)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하나니 이것이 정관이다」라고 쌍조, 다시 분명히 긍정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밀의로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가전연아, '일체는 있다(有)'라고 한다. 이것은 첫 번째 극단이니라. '일체는 없다(無)'라고 한다. 이것은 두 번째 극단이니라.[ 見] 가전연아, 여래는 이 양단(兩端)을 떠나서 [離見]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하나니라」
[非有非無, 亦有亦無, 亦生亦滅]
모든 것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이 없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어서 영원성이 없어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제 2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존재에 영원성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즉 비유비무(非有非無)며 역유역무(亦有亦無)이며, 역유역무가 역생역멸(亦生亦滅)입니다.
앞 구절에 「마음의 의처에 취착하지 아니하고 계사되지 않아서 거기에 머물지도 아니한다」고 한 것은 양극단을 여윈 것이니 이것은 진공이요 쌍차입니다. 그리하여 「고(苦)가 생기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본다」는 것이니 이것은 묘유이며 쌍조이니 비유비무이면서 역유역무가 되는 것입니다. 생(生)이 즉 유(有)이며 멸(滅)이 즉 무(無)입니다.
여래(如來)가 정등각(正等覺)하고 법을 설하는 것은 중도이니, 중도는 모든 양 극단을 떠나서 양 극단이 서로 통하며 융합하는 것입니다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에 연하여 식(識)이 있나니라[亦生亦有] 이러한 것이 전고온(全苦蘊)의 집(集)[非無]이니라. 무명의 멸에 의(衣)하여 행(行)의 멸이 있고, 행이 멸하는 고로 식의 멸이 있나니라. [亦滅亦無] 이러한 것이 전고온의 멸이니라.」
처음엔 12연기(十二緣起)의 순관(順觀)을 듣고 끝에가서 전체를 들어 전고온의 집(集)이라고 하시니 이것은 사성제(四聖諦)의 집제(集諦)입니다. 앞에서 집제를 바로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가 없다고 했으니 없는 것이 아니다(非無)는 것입니다. 비무는 즉 또한 있다(亦有)는 말이니, 생(生)을 바로 본다(亦生)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 이해가 바로 서야 합니다.
집(集)을 바로 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無見)가 없다 하니 없다는 것이 없다(非無)는 것입니다. 집을 바로보는 사람은 생을 바로 보는 사람이니, 그것은 또한 생함(亦生)이니, 그러므로 없다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내용적으로는 또한 있음이 됩니다. 생을 바로 보는 것을 집(集)을 바로 보는 것이므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 없다(非無)는 것이므로 한가지 말 속에 두가지 뜻을 표현하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째서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그것은 사량분별 때문입니다. 아(我) 주관과 아소(我所). 모든 것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덥다.
나의 것이라 생각한 모든것은 순간 필용의 앞에서 머물고 있지만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머물어 있다 한들 내것일까?
아무것도 내것은 없다.
사랑도 나의 가치관도 삶에서 무기력해지는 지친 인생은 나혼자
뿐일까?
바람이 전하는 말
해는 중천에 걸려 뜨것운 햇살을 품어 내더니 이제는 한 밤중외다!
속정이 깊은 당신의 생각은 가슴깊이
넣어 둔터라!
잠시의 생각은 결정을 정리한 소둔은
시간이 해결 할 것이외다.
망설임 없이 뱃어낸 말은 다른 생각을 밀어내어 다시 온전한 나로 돌아온다.
일정한 한 곳에 정착을 꿈꾸고 언젠가 원천화 할 공간은 때가 되면 이루어 드릴 것이 외다!
그생각이 당신의 노고에 답하는 것이 아닐것입니다!
내가 돌아갈 중천!
남은 시간에 당신이 주는 안락함의 이시간은 아직 한낮 입니다!
양면의 칼날을 가진 우리는 본성에 따라 격동을 유발하지만 우리는 아직 온전한 감성은 읶지 못한 풋내나는 삶을 꿈꾸지만 우린 중년의 끝이라오!
축복 받는 삶의 꿈은 잊어지고 곧은 성품이 주는 안정을 도모 할 미션으로 남은 노년을 준비할 시간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물리적 한개를 벗어날수 없는
청춘을 소멸 할 에너지를 가진 중년의
터널이 주는 미련을 더하는 전진만 남은 긴밤 인간이 느끼는 소리없는 감성만 못다한 소멸의 시간만 남은 투윈의 삶은 언젠가 소멸 할것입니다!
삶도 감성도 안정도 희망도 비원이 주는 미련도!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 일 것이다.
또 오월이 저물어가고 6월은 시작 될 것이다.
사람은 가고 우린 여기에 남아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간다.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하게 산 자의 망각이 나를 흔든다.
열심히 살아내자.
아름답게 이 움켜진 그리움도 놓고 갈날을!
난 비명처럼 흩어러진 잔인 한 유월을 이젠
잊고 살고 싶다.
나만의 감정에 익숙한 내 자신을 내려 버려 죽여 버리고 싶다.
그리움이 없는 자
망각의 세월을 살아 아직 여기에 머뭅니다.
영원 할 수 없는 삶 그래도 연명의 끈이 남아
아름다운 날을 찾아 앞만 보는 바보
오늘도 많이 웃겠노라!
하루!
정말 고단한 삶들이 만드는 시간들은
또 나를 몰고 어디론가 가고있다.
우린 어디에서 시작 되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의 앨범에 닮은 순간 순간들!
찢어지고 페허가 되어 멈춤없는 기적은 나를 또 다른
희망을 품어보게 하지만 그 좁쌀 같은 묘수도
이젠 황망한 미련이 되어간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백과 미련이 만드는 여백에서 나는 또다른
허무를 배워가며 여기에 머문다.
기억 저편의 묻어둔 짧았던 미련은 또다시
꺼어내어 되세겨 보지만 저편의 아쉬움만 남는
나의 부족함은 오늘 이 시간에도 기억 저편을 돌아보게 한다.
그곳은 살만한 곳인가요?
어딜 돌아 보아도 삶은 미련 투성이 라오!
미련없이 살자!
내가 우리가 머무는 이곳에서!
* Anyone who You need an object of love, an object of devotion. Parents, children, spouses, mentors, friends, gods, etc. Everything, even life, for the can dedicate It is possible to empty me. should be able to set me on fire, You should be able to throw it all over your body. What does love and devotion bring? It's not what you want to get. pain and hurt and sacrifice to be determined, and to find peace and joy in it is to get through the object of devotion I am growing up.
시간! 바람 처럼 멀리 떠날 날들이 속절없이 가까워 지는날! 별이 될 날들은 구름처럼 아쉬움을 남길걸 무슨 미련을 깔아 삶에 무슨 아쉬움이 있으랴. 구름에 가리어 달무리 처럼 잠시의 허무와 시련은 내자신을 여물게 하였다. 싸늘한 빰에 흘러내리던 속절없는 뜨겁던 눈물이 감추어진지 오래이지만! 버려진 시간을 나는 지금도 아쉬워 그리워 한다. 이 정도의 삶에서 난 지금 흔들린다. 불꺼진 밤 나의 침대에서 적멸을 생각한다. 나의 사후에는 아들 내소원 들어 주렴! 유골은 보관도 묘비도 쓰지 말거라! 내 정신을 가두었던 껍질은 불살라 인골은 절구에 넣어 부수어 붉은색 봉투에 담아 내가 좋아하는 곳 바람부는 정상에서 봉투를 열어 하얀 한지에 부어 세상 어디든 날아 갈수 있게 날려 주렴! 세상 살아보니 짝지는 내맘 알아주고 고민을 나누고 대화 할 수 있고 충고를 통하여 서로의 견해를 나눌 수 있는 짝을 만나거라! 신의와 믿음을 지킬 사람은 가장 좋은 상대이며 너의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다. 나의 삶은 닮지 말아라! 그리고 나는 죽었다 살아난 제2의삶을 살며 이 환경에서 만난 새로이 만난 3사람은 동행 해야할 중요한 사람들이다. 감정적 상상과 생각은 버려라! 서로 덕이 되는 언어의 선택으로 진실로 대하도록하여라. 그리고 삶에서 돈을 쫒지 말거라. 돈을 찿아 돈을 쫒는자는 돈에 쫒길 것이다 돈을 쫓는 인간은 정신을 잃을때 까지 돈만 쫒아 다닐 인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찾아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세상 물질만능주의 안에 존재하는 있으니! 돈이 너를 찿아오게 하여라! 일부의 삶은 배우되 배운 기술로 벌은 돈은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쓰거라. 그리고 돈의 함정은 삶을 망가 뜨린다. 진실로 사람을 만나고 대하되 정은 주지 말거라. 세상사 아무련 순서는 없단다. 자신이 만든 도덕과 정의로 사심없는 미래를 만들어라. 사람은 만나되 시간을 두고 진실이 통하는 사람과 만나거라. 그리고 갑자기 생기는 행운은 없단다. 노력으로 만든 청결한 집도로 만든 환경과 지나침이 없는 지혜로 내일을 설계하여라. 그리고 후회없는 삶을 살아라! 서영이 사온 술한잔에 생각 많은밤! 쓸말이 적은밤 적은글은 후회없다. 나를 위하여 삶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챙겨 주거라. 내 삶은 2번째 태어난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산은 합천 소리길을 지나 합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 정상 바위가 있는곳이다. 20대에 가보고 아직 가보질 못했네. 언제 한번 가 보려무나...? 그곳이 불편하면 세상에서 내가 시작된 고향도 괜찮다. 아직 살아 있으니 회기본능이 생기네! 삶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귀한 사람의 분류에는 나를 생산 기회를 부여한 1촌과 고마움과 삶을 나눈 2촌 삶을 동반한 삼촌 그리고 무촌이 동반자이다. 희생의 가치를 가지고 귀한 사람의 순서를 정하는것이다. 세상살이 만만하게 보지 말거라! 그래도 내편은 만들고 살아라. 배웠지만 내편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아직도 삶을 배회하며 사는이 많으니! 나이 이십의 중반을 넘으면 도덕의 균형이 잡혀 삶의 기준을 실천으로 옮길 시기이다! 감성의 시간이 지나 또다른 기회에 또 만나세나 싼!
형제여!
동무여!
그리고
두고갈것 밖에 없는 사소한 미력한
시간들이여!
잊어지고 값지 못한 미련들은 아직도
남았고 나의 선택이 2022년을 미련없는 날들을 만들것이다!
오늘도 달빛은 하늘을 밝게 비추고
외로움의 시간들은 이젠 멈추어 외롭지 아니하고 쓸쓸하지 않아 명월은 차가운 빛만 남기니
처다볼 용기를 잃었던 날들은 멀어져
가지만 오늘은 한겨울의 매화가
그립고 매화향이 그립다.
머잖은 날 주남을 지키던 철새가 날아
날아가고 봄은 다시 필것이며 사계는
다시 저물것이다...나의 청춘도! 멈추는 날에는 후회 없는 날이되어
이날의 기억을 회상하고 싶다.
나의 적은글은 후회없고 미련만 있을
뿐이다.
종일 뵐 무릅이 엽에 있고 지금이 행복한 시간이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있고 당신이 있으니!
모두가 떠나가는 이곳에 같이 머물고 있으니!
아직은 지지못한 청춘 앞에 기억은 소실을 거듭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나를 위해 희생한 시간들 머물지 못한
청춘이기에 남은 삶의 행복은 희생한 당신의 필연의 법칙을 당신의 안전과 행복이 당신의 목이되길 이밤도 빌어봅니다!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