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추억을 향유하며 추억하며 잊어지는 무향의 인격체이다!
무지한 삶의 고배를 건너 이젠 남은 삶은 아름답게 살아 내는것!
바람이 전하는 말
해는 중천에 걸려 뜨것운 햇살을 품어 내더니 이제는 한 밤중외다!
속정이 깊은 당신의 생각은 가슴깊이
넣어 둔터라!
잠시의 생각은 결정을 정리한 소둔은
시간이 해결 할 것이외다.
망설임 없이 뱃어낸 말은 다른 생각을 밀어내어 다시 온전한 나로 돌아온다.
일정한 한 곳에 정착을 꿈꾸고 언젠가 원천화 할 공간은 때가 되면 이루어 드릴 것이 외다!
그생각이 당신의 노고에 답하는 것이 아닐것입니다!
내가 돌아갈 중천!
남은 시간에 당신이 주는 안락함의 이시간은 아직 한낮 입니다!
양면의 칼날을 가진 우리는 본성에 따라 격동을 유발하지만 우리는 아직 온전한 감성은 읶지 못한 풋내나는 삶을 꿈꾸지만 우린 중년의 끝이라오!
축복 받는 삶의 꿈은 잊어지고 곧은 성품이 주는 안정을 도모 할 미션으로 남은 노년을 준비할 시간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물리적 한개를 벗어날수 없는
청춘을 소멸 할 에너지를 가진 중년의
터널이 주는 미련을 더하는 전진만 남은 긴밤 인간이 느끼는 소리없는 감성만 못다한 소멸의 시간만 남은 투윈의 삶은 언젠가 소멸 할것입니다!
삶도 감성도 안정도 희망도 비원이 주는 미련도!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 일 것이다.
다시 남은 한번 내삶을 챙기자!
한번만 더 제대로된 시간을 채워 살아보자!
거칠어 지는 피부 주름지는 껍질 무엇하나 뜻대로 살아보지 못할 시간을 낭비하며 후회 남는 시간을 나는 보내고 있다.
남은 시간 다시 나를 챙기면서 남아야 겠다!
내편 되어준 삶들을 빚지어진 삶들로 바로
채워 살아갈수 있게 빌어 보지만 꿈으로
만들어준 삶을 희생으로 다시 피워 봐야
겠지만 나는 무익한 시간을 축내고있다.
초침은 분침을 도와 시침은 오늘도 새날이
되어 내곁에 와있네!
오늘 결정한 것은 내일 실행하여야 한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살자!
미천한 시간이 생각이 만들어준 삶을 다시 계산하여 생각 해본다.
後回 없는 삶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지?
* 불교의 이해 *
불교의 근본 사상...(6) 가전연경(迦전延經)의 정견(正見)
[불교의 근본사상] 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
10. 가전연경(迦전延經)의 정견(正見)
가전연경이란 근본불교에서 가장 핵심되는 경입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한 내용, 즉 중도(中道)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가전연경에 대해서 논의가 많았습니다. 그런 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고 또 중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면 이 가전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가전연이란 부처님 신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논의제일(論議第一)이었던 가전연존자를 말합니다. 아주 의논을 잘하고 논의에 밝은 분이었습니다.
어느날 가전연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대덕(大德0이시여 정견(正見)을 갖추어야 한다, 정견을 갖추어야 한다 하시니 정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모든 세간의 학문이나 종교는 무엇이 있다(有)든가 무엇이 없다(無)든가 하는,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의두 가지 견해에 떨어져 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상대적인 대상에서 가장 기본되는 견해가 유·무라는 견해이니 이 상대적인 유·무가 완전히 해결되면 그밖의 모든 상대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와 무를 대표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거 고(苦)와 낙(樂)을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그때는 오비구(五比丘)가 고행(苦行)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고와 낙을 말씀하셨던 것이고 이 가전연경에서 정견(正見)이라는 근본문제를 가지고 깊게 설명함에 있어서 일체 세계의 대표적인 상대인 유와 무를 들은 것입니다.
변견(邊見)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이라는 뜻입니다.
「가전연아, 정혜(正慧)로써 여실(如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觀) [正觀生]하는 자(者)에게는 이 세간에 무인 것이 없다.[非無] 가전연아, 정혜로써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유인 것이 없다.[非有]」
남전대장경 제13권 상응부경 가전연경(南傳大藏經 第十三卷 相應部경 迦전延經)
집(集)이란 4성제(四聖제)의 집제(集제)이니, 집제란 연기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에도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관으로 연기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이 일어난다,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생겨나 살아가고 있고, 있음으로 하여 결국 존재해 있음을 말하니 이러한 현상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세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여 보았자 통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책상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세상 모든 것이 없다는 견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생(生)하는 법을 바로 본다(正觀生)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존재해 있고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있는 것을 바로 보면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없음이 아닌(非無) 것입니다.
멸(滅)이란 사성제(四聖제)의 멸제(滅제)이니 멸제란 역관(逆觀)으로 연멸법(緣滅法)을 이르는 말이니 설명하자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것으로써 책상도 나무가 썩어 버리면 없어지고 너도, 나도 촛불도 시간과 공간이 다하면 없어지기 마련이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또 다른 한편에서 관찰해 보면 소멸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없어지는(滅) 법을 바로 본다.(正觀滅)는 것이며 이런 견해로 세상을 보면 모든 존재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내가 없는 것을 바라보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있다는 것이 아닌(非有)것이 됩니다. 따라서 없는 것이 아닌 있다는 견해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없어지는 것을 보고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고 다시 모든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견(有見)측에서는 무견(無見)이 틀리고 무견 측에서는 유견이 틀리는 것입니다.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방편(方便)에 취착(取着)하며 계교(計較)하며 사로잡히(囚)나니 성제자(聖弟子)는 이 마음의 의처(依處)에 취착하며 계편(計便)되어서 「나의 나」라고 사로잡히지 않으며 착(着)하지 않으며 머물지(住) 않고[囚有消滅], 고(苦)가 생(生)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定觀亦生亦觀] 혹(惑)하지 않으며 의심(疑心)하지 않으며 타(他)에 연(緣)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生)하나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그것은 사량분별 때문입니다. 아(我) 주관과 아소(我所), 객관등의 모양에 사로잡혀 사량분별하는 이것을 여기서는 방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이 생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제자, 즉 부처님의 제자는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을 버리고 모든 분별심, 생멸심을 떠나버리며 결국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하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냥 고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는 것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세간에서 보는 것은 분별심으로 보는 것이고 부처님의 제자는 분별심을 떠나서 보기 때문에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집착하고 계사하는 마음을 버리고 사로 잡히거나 머물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무주심(無住心), 무분별심(無分別心)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변견은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있고 부처님 제자의 정견은 무분별심이 근본이 되고 있는 것이니 불생불멸의 경지에서 생멸을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는 모든 분별에 사로 잡히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고(苦)의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쌍조(雙照)이니 이것이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定觀亦生亦滅)는 것입니다.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변견이 아니며 생멸견해가 아닙니다.
생멸적인 변견은 바로 삼차원의 세계에서 보는 관점이고 생멸을 떠나서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을 묘유(妙有), 즉 사차원의 세계에서 보는 견해로서 절대적인 견해입니다.
앞의 말씀을 잘 구별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집착을 떠난다고 하고서 결국은 또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고 했으니, 이 생멸은 보통 생멸의 생멸이 아닌가 하고 오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생멸의 생멸이 아니고 불생불멸의 생멸, 즉 집착하지도 머물지도 아니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생멸이라는 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멸,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생멸입니다. 생멸의 생멸이 아니라 쌍차에 의지한 쌍조의 생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마음의 의지처, 즉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도 아니한다고 부정하였으므로 그것은 모든 생멸을 부정한 것입니다.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니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분별심이 없이 이에 지혜가 생한다는 긍정이 나옵니다. 긍정은 심광명(心光明)을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면 심청정(心靑淨)이며 진공이며 쌍차입니다. 심청정하여 생멸을 바로보면 심광명이고 모유이며 쌍조입니다. 그러므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보아서(定觀亦生亦滅) 진공묘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혹(惑)하지 아니하며 의심(疑心)하지 아니하며 타에 의지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하니 이것이 정관(正觀)이다」하는 것은 부처에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조사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는 머물음이 없는 마음, 무주심(無住心)에서 진실의 지혜가 나타나는데 이 지혜를 정견(正見)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무주심이란 진여심, 반야심을 말하니 의지함이 없는 완전한 진공이 즉 진여심이니, 의지함이 없는 진여반야에서 지혜가 생하니 이것이 정견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견의 내용은 모두 집착심, 생멸심을 다 버리고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이니 쌍차하여 쌍조한 것이며 진공묘유이며, 청정심을 얻으며 심광명이 바로 현전함을 말합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이 아직 완전한 연결을 못시키고 있습니다.
중도라 하여 양변을 여읜다, 쌍차한다 하는 부정의 면은 보통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데 다시 양변을 살린다, 쌍조한다는 부정한 후에 다시 그것을 긍정하는 이것을 지금도 학자들이 잘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좀 많이 연구했다는 학자들의 책을 봐도 양변을 여읜다는, 쌍차라는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드러나 있으나 그걸 가지고 증거를 대는데 있어 부정한 후 그것을 다시 긍정하는 면에 대해서는 즉 양변을 살리다, 쌍조한다는데 대해서는 부처님의 밀의(密意)로서 은밀히 말했다고만 말하고 확실한 증거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만치 이것이 어려운 대목입니다.
밀의로써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쌍차, 부정(否定)하신 후에 다시 분명하게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타(他)에 의(依)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하나니 이것이 정관이다」라고 쌍조, 다시 분명히 긍정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밀의로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가전연아, '일체는 있다(有)'라고 한다. 이것은 첫 번째 극단이니라. '일체는 없다(無)'라고 한다. 이것은 두 번째 극단이니라.[ 見] 가전연아, 여래는 이 양단(兩端)을 떠나서 [離見]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하나니라」
[非有非無, 亦有亦無, 亦生亦滅]
모든 것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이 없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어서 영원성이 없어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제 2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존재에 영원성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즉 비유비무(非有非無)며 역유역무(亦有亦無)이며, 역유역무가 역생역멸(亦生亦滅)입니다.
앞 구절에 「마음의 의처에 취착하지 아니하고 계사되지 않아서 거기에 머물지도 아니한다」고 한 것은 양극단을 여윈 것이니 이것은 진공이요 쌍차입니다. 그리하여 「고(苦)가 생기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본다」는 것이니 이것은 묘유이며 쌍조이니 비유비무이면서 역유역무가 되는 것입니다. 생(生)이 즉 유(有)이며 멸(滅)이 즉 무(無)입니다.
여래(如來)가 정등각(正等覺)하고 법을 설하는 것은 중도이니, 중도는 모든 양 극단을 떠나서 양 극단이 서로 통하며 융합하는 것입니다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에 연하여 식(識)이 있나니라[亦生亦有] 이러한 것이 전고온(全苦蘊)의 집(集)[非無]이니라. 무명의 멸에 의(衣)하여 행(行)의 멸이 있고, 행이 멸하는 고로 식의 멸이 있나니라. [亦滅亦無] 이러한 것이 전고온의 멸이니라.」
처음엔 12연기(十二緣起)의 순관(順觀)을 듣고 끝에가서 전체를 들어 전고온의 집(集)이라고 하시니 이것은 사성제(四聖諦)의 집제(集諦)입니다. 앞에서 집제를 바로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가 없다고 했으니 없는 것이 아니다(非無)는 것입니다. 비무는 즉 또한 있다(亦有)는 말이니, 생(生)을 바로 본다(亦生)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 이해가 바로 서야 합니다.
집(集)을 바로 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無見)가 없다 하니 없다는 것이 없다(非無)는 것입니다. 집을 바로보는 사람은 생을 바로 보는 사람이니, 그것은 또한 생함(亦生)이니, 그러므로 없다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내용적으로는 또한 있음이 됩니다. 생을 바로 보는 것을 집(集)을 바로 보는 것이므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 없다(非無)는 것이므로 한가지 말 속에 두가지 뜻을 표현하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째서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그것은 사량분별 때문입니다. 아(我) 주관과 아소(我所). 모든 것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그것은!
참고 인내하며!
감래하며 헌신하며!
상대의 상처를 담을 넉넉한 그릇을 준비한 끝없는 미련을 떨쳐버릴
시련을 버리는 연습을 갈구하는 것.
그러나 사랑은 나를 지키고 미련을 버려 자신을 본 모습을 복원하는것.
버려서 남는 것은 미련이다.
이 미련 마져 지우개 없이 지워 삶을
지워 운명화 시키는것!
청춘의 시간을 지나 사랑을 배우고 진정함을 배운 현실 시간은 돌고 돌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허허로운것에 만족을 갈구하지만 결제의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
목적없는 타성에 늪에 갚혀 가치 없는 시간만 축내고 있다.
과거를 버려 편안해지는 다소한 삶에서 만족해가는 일상이 이제 연습이 되어간다.
사랑 그것은 혼돈의 시간을 냉정과 정열로 미련없이 사는것!
주남 저수지의 가을!
☆☆☆
[ 청담 장윤숙 시인의 러브레타 ]
누가 썼는지 참 잘 쓴 글이라 소개합니다.
아쉽게도 글쓴이를 알 수가 없군요.
《 20,30,40,50,60대~ 젊은이들은 들어라! 》
몇 년 전 돌아가신
우리 외할매는 말했다.
왜정 때,
그래도 이 땅보단 뭔가 나을 듯해 만주로 갔단다.
그리고 뙈놈들한테 갖은 무시를 당하다가,
내 나라가 독립됐단 소리 듣고 이고 지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단다.
그때 우리 어매는
외할매 어깨 위에서 두만강을 건넜단다.
그래, 우리 어매는 만주에서 태어났다.
어느 놈들 논리라면 뙈년이겠구나,
어쨌든 중국 땅에서 태어났으니...
누구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친일파란 소리 들었다니 그렇겠구나.
1917년 태어난 박정희도 만주로 갔지,
그리고 군인이 되었다.
그래서 친일파 라더구나.
그런데 그가 태어났을 때
그가 속할 나라는 이미 일본뿐이었다.
태어난 게 태어난 자의 죄인 거냐?
너희들은 부모를 골라서,
나라를 골라서 태어날 수 있었더냐?
태어난 게 어매 잘못이냐?
박정희 잘못이냐 ?
못 먹고 못 살아 찢어지게 가난하여
조국도 없던 그 시절이 잘못 아니더냐 ?
청나라로 끌려갔던 여인들이
환향녀로 매도되어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지,
화냥년 !
지켜지지 못해
피해 받은 그들이 무슨 잘못 이더냐?
일제 때
이 나라의 꽃다운 처녀들이
성 노예로 끌려갔다고 분개하더라!
그게 누구 잘못이냐?
그녀들의 잘못이냐?
일본놈의 잘못이냐?
그러지 않게
지켜줄 나라가 없어지게 된 탓 아니냐?
그런데 나라를 일제에 넘기고도
이씨 왕가 일족들은
일제가 망하는 그날까지도 호의호식했다 하더라.
그래 우리 외할매는 수꼴이었다.
아니 우리 할매도 할부지도 수꼴이었다.
나라가 없다는 건,
지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지.
그래, 너희들이 비웃는
늙어서 죽어야 하는 80~90대는
내 나라가 없어 서럽던 그런 분들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경험으로 안다.
'내 나라’라는 게 울타리라는 것을,
나라가 없이는 나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안보, 안보 하며
지팡이를 짚고 꼬부라져서라도 태극기를 들고 나서는 것이다.
이제 80을 앞둔 우리 어매는 말한다.
나무껍질 벗겨서 먹어 봤냐고?
부황이 들어 온몸이 퉁퉁 부어봤냐고?
쌀 한줌에 고구마 줄기를
한 솥 넣어 풀죽 끓여 먹어봤냐고?
전염병이 돌면 픽픽 죽어 나가는 사람을 본 적 있냐고?
공부하고 싶어도 학교가 없었던 그 시절을 겪어 봤냐고?
미국?
양키?
우리 어매는 그런 거 모른다.
시골 초봄,
누렇게 떠서 죽어가다가
학교에서 배급으로 나눠준
우유가루로 죽을 끓여 먹고 설사를 할 망정 그 덕분에 살았다 한다.
우리 어매도 6.25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한다.
벌써 70년 전 일이다.
그래도 우리 어매는
단 하나는 안다.
배고픔이
사람을 얼마나 짐승으로 만드는지를!
우리 아배는 말한다.
5.16혁명을 국민들은 반겼다고.
전쟁은 끝났지만,
먹고 살길은 막막했고 못 먹고 못살던
국민들의 패배감은 끝이 없었는데,
민주주의 하겠다던 .. .
4.19 다음에 나라는 되레 난장판?
데모 천지가 되었다고.
그래서 그때는 또 한 번 세상이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가득했다고 그럴 때 난장판인 나라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배고픔을 면하게 해준 건 박정희였다고. 그래!
그래서 우리 어매도 아배도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
너희들이 말하는것처럼
늙어 빠져서 뇌가 마비되어서,
세뇌되어서가 아니라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아야겠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그래도 이만큼 살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은혜 갚음 때문에,
그 뼈저린 경험 때문에 그러하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우습게 보이느냐?
판단력이 흐려진 늙은이들로 보이느냐?
장기집권이 잘못됐다고 하느냐?
유신독재 잘 못됐다고 하느냐?
그러나 그 시대를
열심히 일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그래도 고마웠다고!
먹고 살 만하게 되었기에
그 다음에 저들이 말하는
민주주의고 뭐고가 있게 되었다고!
나라 뺏긴 서러움을 아는 사람,
6.25를 겪은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 말하는 늙어 빠진 노인네들이다.
너희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늙은 수구꼴통들 이다.
그들이 가난을 원수처럼 여겨
나라를 일으키는 초석이 되었다.
자기 한 몸 희생해서 나라를 위해 살아왔다.
나라 없는 설움, 약해서 겪은 전쟁,
그 참상을 알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추구하는 박근혜 밉다고
앞 뒤 가리지 않고 쫓아내고,
공산주의 추종할려는
문재인 좋다고 ‘대깨문’ 해서,
그래 지금 만족스럽느냐?
니들 일자리부터 날아가고
경제는 난장판인데
니들의 ‘이니’는
‘정으니’에게 퍼줄생각에 여념이 없더구나.
그게 니들이 바라던거냐?
아프칸이 탈레반에게 점령되어
참수 당하는 뉴스를 보고도
정신을 못차리냐?
그래 좋다 촛불민주주의,
그런데 그러다 나라의 경제가,
안보가,
다 깨지든 말든
그래도 좋다는 거냐?
알아 두어라.
나라가 있어야 누울 자리가 있고
나라가 강해야 너희들도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때로
나라를 욕하고 촛불을 들 자유도
그 나라가 있고서야
비로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알아 두어라.
장미꽃은 향기롭지만
결코,
수프를 끓여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배추 시래기로라도 배를 든든히 하고서야 장미향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무엇이든 기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희들도 잘 알 것이다.
그 기본은 바로 "나라" 다.
그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
너희들의 나라이다.
이 멍청하기 그지없는 불쌍한~~~
20~
30~
40대들아
정신차려라!
네놈들이 나라가없어도
지금처럼 대가리
하늘로 처들고 살수 있을것이라 생각 하느냐???
나라는 첫째가 안보다.
북쪽의 핵을 머리에 이고 있으며
중국의시진핑과 그수하들은 시도때도 없이 한반도의 모든것들이
자기들 것처럼
온갖 수단을 동원해 별의별짓 다하며
대한민국의 일에 사사건건 시비하고,
재한 중국놈들
특히 조선족들을 동원해 온갖 참견하며,
촛불들고 못된짓에는 다동원되고,
지랄발광들 하고,
안보 못지않게 주요한것이 경제 아닌가,
헌데 의원수 많다고
더불당은 국회폭력을 극악으로 휘들러서,
안보와 경제를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는나라의 기둥들을
29번이나
탠핵하여 쫒아내고,
일할 예산은
모두 삭감하여 손발을 묶어놓고 ...
아이고 참,어렵다.답답하다.
그래놓고도 입만 열면 경제고,민생 이란다.
오호,통제라! 이를 어이 풀어야 할꼬?
이나라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살길이 열리도록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나라 백성들이
깨닫고 바보짓을 하지 않게 하시고,
총명함을 되찾게 하시옵소서!이땅에서 태어났으니,
이땅을 위해 땀흘리며
이땅을 위해 몸바쳐 일하다가
이땅에 묻힐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2025. 1월 어느날. 논산에서•••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봄이 오면 생각나는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은
평북 구성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정식 이다.
18세인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일본 유학 중
관동대지진으로 도쿄 상과대학을 중단했다.
고향에서 조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망하고 동아일보 지국을 열었으나 당시 대중들의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았다.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하였다.
결국 1934년 12월 24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자살설이 많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고 말하면서 우울해했다고 합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압 통치 시절,
32세의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면서 詩作(시작) 활동을 했다.
성장 과정에서 겪은 '恨(한)'을
여성적 감성으로 주옥같은 많은 서정시를 남겼다
작품으로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강촌,
♡왕십리,
♡산유화,
♡초혼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전 국민의 애송시
"진달래꽃 1925", "산유화"가 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교과서에 실려 유명해졌던
"초혼"이란 詩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져 있다.
1904년, 김소월이 세살 때
아버지 김성도가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 후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조부 집으로 이사하여
아픈 상처를 가진 채 성장한다.
남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했다.
오산학교 시절에
김소월은 3살 많은 누나 '오순'을 알게 된다.
둘은 서로 의지하고 상처를 보듬으며 사랑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오산학교 재학 중 14세 때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강제로 결혼한다.
당시는 흔한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오순이 19살이 됐을 때,
그녀도 억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이후 둘의 연락은 끊겼지만
소월은 어려울 때
자신의 아픔을 보듬어주던 오순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가혹해서
얼마 되지 않아
너무나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한다.
3년 뒤에 오순이
그의 남편에게 맞아 사망한 것이다.
그 남편이란 작자는
심한 의처증에 시달려
걸핏하면 폭력을 일삼는 포악한 자였다.
소월은
가슴 아픈 마음을 안고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리고 사랑했던 그녀를 기리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편의 詩를 헌사한다.
바로 교과서에 실렸던 "초혼( 招魂)"이다.
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招魂"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것을 뜻한다.
소월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비탄과 절망감을
격정적인 어조로 절절히 노래하여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김소월의 많은 작품 중
유명한 시들을 모아 올려본다!
소월의 아름다운 정서를 공유하며 ...
■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오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어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뜨리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나겠지요?
■ 산유화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개여울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먼 후일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가는 길 ⚘
그립다 말을 할까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한번 그리워
저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무덤 🌱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 저기,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내 넋을 잡아 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___________
김소월은
민족의 전통과
민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詩를 남겼다
그의 대표작 진달래꽃은
단순한 이별의 슬픔을 넘어
한국인의 정서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라는 싯구는
깊은 체념과 배려 속에서
고통을 승화시킨 恨(한)의 정수를 보여준다
김소월의 詩는
당시 일제 강점기라는 민족적 아픔과 억압을 담아내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그러나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삶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어린시절 부터 아버지의 정신질환과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성장했으며
결혼생활 또한 원만하지 못했다
이 모든 요소는
그의 내면에 깊은 고독감을 심어 주었다 .
문학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심리적 압박 시적 영감과
이상을 추구하는 내면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의 무게는
그의 삶을 점점 무겁게 했다
1934년 12월 24일
끝내 자신의 生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겨우 32세 때.
나자신 외에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